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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기 돼지는 크리스토퍼 로빈의 바지 멜빵을 태어나서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. 그런데 그 멜빵이 어찌나 새파란 색이었던지 한 번 보고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던 거야. 아기 돼지는 그 바지 멜빵을 다시 본다는 상상만 해도 엄청나게 흥분하곤 했지. 그러면서 끔찍하게 신경이 날카로워졌지. 만일 그 바지 멜빵이 진짜로 그렇게 눈에 시리도록 새파란 색이 아니라면,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걱정이었어. 만일 그 멜빵이 아기 돼지가 이제까지 수없이 보아온 보통의 별 볼일 없는 파란 색이라면? 하지만 크리스토퍼 로빈이 재킷을 벗었을 때, 아기 돼지는 기뻐서 기절할 지경이 돼. 그 바지 멜빵이 정말 자기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 시리도록 새파란 색이었거든. 그래서 아기 돼지는 그 날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거야. 이 이야기는 그저 별것 아닌 멜빵 이야기 같지만, 사실 거기엔 그 이상의 뜻이 담겨 있어. 이 이야기를 읽으면 난 어떤 돛단배 그림이 떠올라. 언젠가 우리가 여행을 갔을 때 묵었던 어느 시골집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야. 그건 분명 아주 평범한 배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. 하지만 나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로 보였지. 매일 저녁 엄마는 나한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난 그 돛단배를 타고 지구를 돌며 낯선 나라들로 배를 저어갔던 거야.
이 편지에서 이미 빙하를 너무나 자주 언급했기 때문에 이제 얀 에리크 볼드의 시 한 편을 덧붙여 보낼게. 이 시를 이해하려면 아마 디플로메이스-에스키모(‘디플로메이스’는 노르웨이의 아이스크림 제품 이름. 그 광고에 에스키모가 그려져 있음─옮긴이)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할거야. 한 손을 진짜 에스키모가 인사할 때처럼 높이 쳐들고 있다고. 석 줄밖에 안 되지만 완벽한 한 편의 시야.
운송차에 붙어 있는
디플로메이스-에스키모
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.
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정말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어. 이렇게 짧은 시지만 그 짧은 시간에 나는 정말 미쳐버린 거야.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? 정말 그 아이스크림 차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어. 마치 내가 그린란드 빙하 위에 달랑 혼자 버려져 있다가 갑자기 나랑 똑같이 외로운 디플로메이스-에스키모를 만난 것처럼 말이야!
난 지금 너한테 손을 흔들고 있어.
너도 나한테 손을 흔들고 있니?
요슈타인 가아더, 클라우스 하게루프 <마법의 도서관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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